대통령 메시지 노출 권성동 리더십 '흔들'..."잇단 실수 책임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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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삼유여민 작성일22-07-27 14:10 조회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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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사적 문자 메시지를 노출해 당내 혼란을 야기한 국민의힘 권성동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잇따른 사과로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권 대행은 27일 오전 국회에서 취재진에게 “사적 문자 내용이 저의 부주의로 유출·공개돼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송구하게 생각한다”며 허리 숙여 사과했다.전날 이준석 대표를 ‘내부총질이나 하는 당대표’로 지칭한 윤석열 대통령의 문자메시지 장면이 권 대행의 핸드폰을 통해 노출됐다. 한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된 권 대표의 핸드폰 화면에는 “우리 당도 잘하네요. 계속 이렇게 해야”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가 떴다. 이를 두고 정치권은 윤 대통령의 의중이 이 대표 징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권 대행은 지난 21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도 여권 내 내홍과 국회 원구성 지연과 관련해 허리를 90도로 숙여 사과했다. 앞서 지난 20일에도 권 대행은 대통령실 채용과 관련한 자신의 ‘9급 공무원’ 발언에 대한 사과를 했다.
국민의힘 권성동 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2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부산·울산·경남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성일종 정책위의장과 휴대전화를 보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에 당내 권 대행이 당내 구심력이 약화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원내대표 취임 뒤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 합의, 9급 공무원 발언, 윤 대통령과의 문자 메시지 공개 등 잇따른 실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당내에서는 “권 대행 취임 후 석 달 만에 대국민 사과를 몇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리더십이 불안하다” “공개된 문자 메시지를 보면 당 지도부가 용산(대통령실)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거나, 용산의 하명을 수행한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국민들이 보지 않겠나. 지금이라도 제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한다.시사평론가 장성철 가톨릭대 특임교수는 SNS에 글을 올려 “‘다름’이 ‘틀린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생각이 그렇다면 이 정권은 망했다”며 “‘박근혜의 배신의 정치’, ‘윤석열의 내부총질’”이라고 맹공했다.하지만 국민의힘 내 혼란을 수습할 마땅한 방법도 없다. 당헌당규상 조기전당대회를 치를 수 없는 상황에서 혼란 없이 지도체제를 교체할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권성동 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2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부산·울산·경남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성일종 정책위의장과 휴대전화를 보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에 당내 권 대행이 당내 구심력이 약화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원내대표 취임 뒤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 합의, 9급 공무원 발언, 윤 대통령과의 문자 메시지 공개 등 잇따른 실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당내에서는 “권 대행 취임 후 석 달 만에 대국민 사과를 몇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리더십이 불안하다” “공개된 문자 메시지를 보면 당 지도부가 용산(대통령실)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거나, 용산의 하명을 수행한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국민들이 보지 않겠나. 지금이라도 제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한다.시사평론가 장성철 가톨릭대 특임교수는 SNS에 글을 올려 “‘다름’이 ‘틀린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생각이 그렇다면 이 정권은 망했다”며 “‘박근혜의 배신의 정치’, ‘윤석열의 내부총질’”이라고 맹공했다.하지만 국민의힘 내 혼란을 수습할 마땅한 방법도 없다. 당헌당규상 조기전당대회를 치를 수 없는 상황에서 혼란 없이 지도체제를 교체할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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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숙함이 감도는 김유신장군묘 김유신 장군은 죽어서 왕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묘도 왕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운민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주 IC로 빠져나와 창가 왼쪽으로 펼쳐진 거대한 고분군을 보며 우리는 비로소 경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서악산을 배경 삼아 줄을 서듯 일렬로 배열해 있는 그 모습이 도심에 위치한 고분군과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서악동 고분군이라 불리는 이곳의 주인공들이 온전히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맨 앞에 자리한 주인공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 큰 공헌을 세운 태종 무열왕, 김춘추다. 그리고 그의 평생의 친우이자 동료였던 김유신 장군의 묘도 여기서 머지않은 곳에 자리한다.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공을 세웠지만 외세의 힘을 빌린 완전한 통일이 아니었다는 점은 사학계의 많은 논란거리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서악산 주변의 주목 않은 유물들
▲ 서악동고분군의 전경 선도산 자락, 구릉지에 위치한 서악동고분군은 봉분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운민경주의 서쪽에 자리한 서악산은 흔히 선도산으로 일컬어진다. 고대 신라인들은 이 산을 가리켜 서방정토의 땅으로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권5 감통편에는 선도산을 지키던 성모에 대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진평왕 당시 안흥사의 여승 지혜가 불전을 수리하려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선도산의 성모가 내려와 그를 모신 신사를 파보라고 하니 황금 160냥이 나왔다는 이야기다. 그 밖에도 세대에 걸쳐서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이 산자락에 얽힌 수많은 문화재들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것 같다.서악산, 즉 선도산의 높이는 390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이 산주위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정상 가까이에는 보물로 지정된 서악동 마애여래삼존불상은 물론 서악동 삼층석탑, 도봉서당과 서악서원 등 우리가 주목하지 못했던 수많은 유적이 존재한다.서악산 자락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한옥마을인 서악 마을에 하룻밤을 묵는다면 동네 마실을 나가듯 산책하면서 역사의 향기가 담겨있는 이 모든 것들을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서악 마을 입구에는 조선시대 건립된 서악서원이 있는데 좀처럼 보기 드문 신라시대의 인물(김유신, 최치원, 설총)을 모시고 있다. 다른 서원들과 별다른 차이는 보이지 않지만 같은 고장의 옥산서원과 더불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유서 깊은 서원이다.
▲ 태종무열왕릉비 태종무열왕릉에 자리한 그의 비는 국보로 지정되 있으며, 신라조각 중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운민현재는 서원에서 숙박을 할 수 있는 고택체험도 존재하니 꼭 한번 해보시길 추천드린다. 서악서원을 지나 정겨운 마을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조선 성종 시기 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불권헌 황정을 기렸던 도봉서당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편 선도산 자락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고분군들과 삼층석탑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이 일대는 해마다 가을이면 구절초 꽃밭이 되어 많은 사진가들의 발길을 이끌게 한다. 이 고분들의 주인공들은 각각 진흥왕릉과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라 전해지지만 확실치 않다. 조선 후기 경주 김씨 가문이 세를 불리게 되면서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적당한 고분을 선정해 비정한 명칭들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 무열왕릉 서악동고분군의 맨앞에 자리한 무열왕릉은 주인이 밝혀진 7개의 신라고분 중 하나다. 그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으며, 진골출신의 최초의 신라왕이다.ⓒ 운민 최근 신라 왕릉의 정확한 주인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선도산 고분들의 주인이 왕이 아니어도 아쉬울 것은 전혀 없다. 바로 건너편 담장을 맞대고 있는 서악동 고분군의 주인들은 확실히 왕이 분명하기 때문이다.태종 무열왕릉을 비롯해 총 5기의 고분군은 시내에 위치한 대릉원의 고분만큼이나 규모가 크고 장대하다. 이전의 고분군은 대부분 신라왕성에 밀집해 있었지만 신라왕 중 최초로 성골이 아닌 진골의 신분으로 왕좌를 차지한 김춘추는 새로운 권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대부분의 신라 왕릉들은 묻힌 왕과 왕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태종 무열왕릉의 주인은 확실하다. 바로 앞에 그 주인을 가리키는 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비석의 몸체는 소실되었지만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과 태종 무열대왕 지비가 새겨진 이수(비석의 머리)는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이 비석은 문무왕 시기 명필가로 유명했던 그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작성했다고 전해지며 거북 조각의 표현기법이나 조각 기술을 측면으로 살펴보면 가히 신라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길 건너에는 앞서 언급한 김인문과 그의 후손인 김양의 묘가 자리한다. 김인문 묘 앞에는 조금 작지만 거북이 모양의 비석 받침이 남아있다.무열왕릉보다 더 재밌는 이곳의 매력
▲ 김양, 김인문묘 무열왕릉에서 찻길을 건너면 그의 아들인 김인문의 묘와 후손인 김양의 묘가 함께 자리해 있다.ⓒ 운민 보통 관광객들은 무열 왕비와 무열왕릉을 서성거리다가 돌아가지만 이곳의 진정한 매력은 일렬로 늘어서 있는 서악동 고분군을 산책하는 것이다. 아마도 무열왕의 직계 조상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군은 산자락을 따라 늘어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평지에 있는 대형고분군과 다른 또 다른 매력이 존재한다.철마다 다양한 꽃과 어우러져 신비한 모습을 연출하는 서악동 고분군은 새벽녘 가벼운 산책길로 더할 나위 없다. 원래는 왕이 되지 못할 운명을 지녔던 그는 백제의 거센 반격으로 위기에 처했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당 동맹을 이끌어 냈다. 결국 왕위에 올라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는 못한다.그의 일생을 고분군에서 반추해보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김유신 장군묘로 발길을 옮겨본다. 신라를 대표하는 명장 김유신은 김춘추와 마찬가지로 권력의 중추에서 벗어나 있던 가야의 왕족 출신이었다. 그는 극도의 정치 불안정 속에서 약화한 신라군을 이끌고 꾸준히 일어났던 서라벌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그는 결국 김춘추보다 오래 살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것을 보고 만다. 김유신 사후 흥덕왕에 의해 흥무왕으로 추존되어 죽어서 왕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만큼 김유신 장군묘는 어느 왕 못지않게 화려하다.그래서 김유신 장군묘는 원성왕릉, 흥덕왕릉처럼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십이지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시기가 맞지 않아 이 봉분의 주인공이 김유신이 아니라 하지만 김상기 박사는 흥덕왕 때 추존하면서 새롭게 보수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마치 사당의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김유신 장군묘는 서악동 고분군처럼 산책의 맛은 느껴지지 않지만 인물의 삶을 더듬어 갈 수 있다. 서악산에 자리한 유적들은 경주 버스터미널에서 쉽게 접근이 가능하니 함께 살펴보시길 바란다.덧붙이는 글
▲ 엄숙함이 감도는 김유신장군묘 김유신 장군은 죽어서 왕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묘도 왕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운민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주 IC로 빠져나와 창가 왼쪽으로 펼쳐진 거대한 고분군을 보며 우리는 비로소 경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서악산을 배경 삼아 줄을 서듯 일렬로 배열해 있는 그 모습이 도심에 위치한 고분군과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서악동 고분군이라 불리는 이곳의 주인공들이 온전히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맨 앞에 자리한 주인공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 큰 공헌을 세운 태종 무열왕, 김춘추다. 그리고 그의 평생의 친우이자 동료였던 김유신 장군의 묘도 여기서 머지않은 곳에 자리한다.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공을 세웠지만 외세의 힘을 빌린 완전한 통일이 아니었다는 점은 사학계의 많은 논란거리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서악산 주변의 주목 않은 유물들
▲ 서악동고분군의 전경 선도산 자락, 구릉지에 위치한 서악동고분군은 봉분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운민경주의 서쪽에 자리한 서악산은 흔히 선도산으로 일컬어진다. 고대 신라인들은 이 산을 가리켜 서방정토의 땅으로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권5 감통편에는 선도산을 지키던 성모에 대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진평왕 당시 안흥사의 여승 지혜가 불전을 수리하려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선도산의 성모가 내려와 그를 모신 신사를 파보라고 하니 황금 160냥이 나왔다는 이야기다. 그 밖에도 세대에 걸쳐서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이 산자락에 얽힌 수많은 문화재들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것 같다.서악산, 즉 선도산의 높이는 390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이 산주위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정상 가까이에는 보물로 지정된 서악동 마애여래삼존불상은 물론 서악동 삼층석탑, 도봉서당과 서악서원 등 우리가 주목하지 못했던 수많은 유적이 존재한다.서악산 자락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한옥마을인 서악 마을에 하룻밤을 묵는다면 동네 마실을 나가듯 산책하면서 역사의 향기가 담겨있는 이 모든 것들을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서악 마을 입구에는 조선시대 건립된 서악서원이 있는데 좀처럼 보기 드문 신라시대의 인물(김유신, 최치원, 설총)을 모시고 있다. 다른 서원들과 별다른 차이는 보이지 않지만 같은 고장의 옥산서원과 더불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유서 깊은 서원이다.
▲ 태종무열왕릉비 태종무열왕릉에 자리한 그의 비는 국보로 지정되 있으며, 신라조각 중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운민현재는 서원에서 숙박을 할 수 있는 고택체험도 존재하니 꼭 한번 해보시길 추천드린다. 서악서원을 지나 정겨운 마을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조선 성종 시기 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불권헌 황정을 기렸던 도봉서당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편 선도산 자락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고분군들과 삼층석탑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이 일대는 해마다 가을이면 구절초 꽃밭이 되어 많은 사진가들의 발길을 이끌게 한다. 이 고분들의 주인공들은 각각 진흥왕릉과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라 전해지지만 확실치 않다. 조선 후기 경주 김씨 가문이 세를 불리게 되면서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적당한 고분을 선정해 비정한 명칭들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 무열왕릉 서악동고분군의 맨앞에 자리한 무열왕릉은 주인이 밝혀진 7개의 신라고분 중 하나다. 그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으며, 진골출신의 최초의 신라왕이다.ⓒ 운민 최근 신라 왕릉의 정확한 주인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선도산 고분들의 주인이 왕이 아니어도 아쉬울 것은 전혀 없다. 바로 건너편 담장을 맞대고 있는 서악동 고분군의 주인들은 확실히 왕이 분명하기 때문이다.태종 무열왕릉을 비롯해 총 5기의 고분군은 시내에 위치한 대릉원의 고분만큼이나 규모가 크고 장대하다. 이전의 고분군은 대부분 신라왕성에 밀집해 있었지만 신라왕 중 최초로 성골이 아닌 진골의 신분으로 왕좌를 차지한 김춘추는 새로운 권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대부분의 신라 왕릉들은 묻힌 왕과 왕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태종 무열왕릉의 주인은 확실하다. 바로 앞에 그 주인을 가리키는 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비석의 몸체는 소실되었지만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과 태종 무열대왕 지비가 새겨진 이수(비석의 머리)는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이 비석은 문무왕 시기 명필가로 유명했던 그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작성했다고 전해지며 거북 조각의 표현기법이나 조각 기술을 측면으로 살펴보면 가히 신라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길 건너에는 앞서 언급한 김인문과 그의 후손인 김양의 묘가 자리한다. 김인문 묘 앞에는 조금 작지만 거북이 모양의 비석 받침이 남아있다.무열왕릉보다 더 재밌는 이곳의 매력
▲ 김양, 김인문묘 무열왕릉에서 찻길을 건너면 그의 아들인 김인문의 묘와 후손인 김양의 묘가 함께 자리해 있다.ⓒ 운민 보통 관광객들은 무열 왕비와 무열왕릉을 서성거리다가 돌아가지만 이곳의 진정한 매력은 일렬로 늘어서 있는 서악동 고분군을 산책하는 것이다. 아마도 무열왕의 직계 조상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군은 산자락을 따라 늘어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평지에 있는 대형고분군과 다른 또 다른 매력이 존재한다.철마다 다양한 꽃과 어우러져 신비한 모습을 연출하는 서악동 고분군은 새벽녘 가벼운 산책길로 더할 나위 없다. 원래는 왕이 되지 못할 운명을 지녔던 그는 백제의 거센 반격으로 위기에 처했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당 동맹을 이끌어 냈다. 결국 왕위에 올라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는 못한다.그의 일생을 고분군에서 반추해보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김유신 장군묘로 발길을 옮겨본다. 신라를 대표하는 명장 김유신은 김춘추와 마찬가지로 권력의 중추에서 벗어나 있던 가야의 왕족 출신이었다. 그는 극도의 정치 불안정 속에서 약화한 신라군을 이끌고 꾸준히 일어났던 서라벌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그는 결국 김춘추보다 오래 살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것을 보고 만다. 김유신 사후 흥덕왕에 의해 흥무왕으로 추존되어 죽어서 왕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만큼 김유신 장군묘는 어느 왕 못지않게 화려하다.그래서 김유신 장군묘는 원성왕릉, 흥덕왕릉처럼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십이지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시기가 맞지 않아 이 봉분의 주인공이 김유신이 아니라 하지만 김상기 박사는 흥덕왕 때 추존하면서 새롭게 보수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마치 사당의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김유신 장군묘는 서악동 고분군처럼 산책의 맛은 느껴지지 않지만 인물의 삶을 더듬어 갈 수 있다. 서악산에 자리한 유적들은 경주 버스터미널에서 쉽게 접근이 가능하니 함께 살펴보시길 바란다.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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