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김혜경 檢송치에 “답정너 수사 유감, 김건희 무혐의와 대비”(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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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예차남 작성일22-09-01 02:51 조회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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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법인카드 사용 몰랐다’는데 무리한 송치” 박성준 대변인 서면 브리핑서 맹비난“공동정범 결론 이미 정해져 있던 것”“검찰 포토라인 세워 괴롭히겠다는 의도”“정치검찰 모자라 경찰마저 불공정 수사”경찰, ‘법카 유용 의혹’ 김씨·배씨 검찰 송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 배우자 김혜경씨가 ‘법인카드 유용 의혹’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23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경찰청으로 출석하고 있다. 2022.08.23 오장환 기자더불어민주당이 31일 이재명 당대표의 부인인 김혜경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 사건이 검찰에 송치된 것과 관련, “무리한 송치이자 ‘답정너’ 수사에 매우 유감”이라면서 “김 여사는 법인카드 사용을 알지도 못했는데 공동정범 결론이 이미 정해졌던 것”이라고 비판했다.박성준 대변인은 이날 서면브리핑에서 “김 여사가 법인카드 사용을 알고 있다는 게 송치의 근거지만, 김 여사는 카드를 쓴 적이 없고 음식물 구입에 법인카드를 쓴 사실도 알지 못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이날 업무상 배임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김씨와 측근인 전 경기도청 별정직 5급 배모씨를 각각 불구속 입건해 검찰에 송치했다.김씨는 이 대표의 경기지사 당선 직후인 2018년 7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측근인 배씨가 경기도청 법인카드로 자신의 음식값을 치른 사실을 알고도 용인한 혐의(업무상배임)를 받는다.
법인카드 유용 의혹을 받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의원 부인 김혜경(가운데)씨가 23일 오후 경기남부경찰청에서 5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나오고 있다.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에 출석한 김씨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연합뉴스배씨의 법인카드 유용 규모는 총 150여건, 2000만원 상당으로 파악됐다. 이 가운데 김씨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법인카드 유용 액수는 20여건, 200만원 상당인 것으로 알려졌다.경찰은 배씨와 ‘윗선’으로 의심받은 김씨 사이에 범행에 대한 묵시적 모의가 있었다고 보고, 김 씨를 이 사건의 공모공동정범으로 검찰에 넘겼다.박 대변인은 “김 여사의 수행책임자도 모르게 김 여사의 동석자 식비를 배씨와 (사건을 제보한) 제보자 등이 결제한 사실이 그들의 대화 녹음에 또렷하다”면서 “그런데도 (김씨가) 공동정범이라니, 결론은 이미 정해졌던 것”이라고 비판했다.이어 “증거를 철저히 무시한 수사는 김 여사를 검찰 포토라인에 세워 모욕을 주고 괴롭히겠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어 유감”이라면서 “경찰이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각종 의혹에 줄줄이 무혐의 결론을 내는 것과 대비된다”고 지적했다.그러면서 “정치검찰도 모자라 경찰마저 불공정한 수사로 사법 정의를 파괴하는 데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2022.07.28박지환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혜경 씨가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과잉의전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2022. 2. 9 김명국 선임기자김혜경 측 “법인카드 사용 몰랐다”배모씨 “과잉 충성에 의한 일”경찰 “범행 모의한 공모공동정범”김씨와 최측근 배씨 특수성 주목앞서 김혜경씨가 경찰 소환조사를 받은 지난 23일 남편 이재명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법인카드를 쓰거나 부당사용을 지시·용인한 게 아닌데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고통을 겪는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한없이 미안할 뿐”이라는 글을 올렸다.이 대표와 김씨 측은 ‘법인카드 유용 의혹’이 처음 제기된 때부터 줄곧 “몰랐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법인카드 직접 사용자인 전 경기도청 별정직 5급 배모씨 역시 자신의 ‘과잉 충성’에 의한 일이라고 밝혔다.배씨는 의혹이 불거진 지난 2월 민주당을 통해 낸 입장문에서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7급 A(사건 최초 제보자)씨에게 요구했다”면서 “이 후보 부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상식적인 선을 넘는 요구를 했다”고 말했다.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의혹 사건, 배모 씨 영장실질심사 출석 -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의혹 사건의 핵심에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배우자 김혜경 씨의 측근 배모 씨(전 경기도청 소속 5급 사무관·별정직)가 30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으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들어가고 있다. 2022.8.30 공동취재그러나 이들의 해명과 달리 경찰은 이날 업무상배임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김씨와 배씨를 함께 송치하면서, 이 사건을 배씨의 단독범행이 아닌 김씨와 배씨의 공동범행으로 봤다.경찰은 그 근거로 김씨를 이 사건 ‘공모공동정범’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공모공동정범은 공범의 범위에 포함되는 개념 중 하나이다. 2인 이상이 범행을 공모해 그 중 일부 인원만 공모에 따라 범죄를 실행했다 하더라도 실제 행위를 하지 않은 공모자까지 함께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판단한다는 규정이다.1997년 대법원 판례에는 “비록 전체의 모의 과정이 없었다 하더라도 수인 사이에 순차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상통해 그 의사의 결합이 이뤄지면 공모 관계가 성립한다”면서 “이러한 공모가 이뤄진 이상 실행 행위에 직접 관여하지 아니한 자라도 다른 공범자의 행위에 대해 공동정범으로서 형사책임을 진다”고 명시돼 있다.
- 23일 오후 김혜경 씨가 ‘법인카드 유용’ 의혹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경기 수원시 장안구 창룡대로 경기남부경찰청에 들어가고 있다. 오장환 기자 경찰은 이번 사건에서 김씨와 배씨 관계의 특수성에 주목했다.배씨는 이 대표의 변호사 시절부터 성남시장, 경기지사, 대선 후보 시절까지 곁을 지키며 도운 최측근으로 분류된다.특히 김씨와 상당 부분 일정을 같이하며 사소한 일도 조율해 온 배씨가 이 대표 부부에게 흠이 될 수 있는 불법적인 일을 독자적으로 했으리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이 판단에는 김씨가 법인카드로 소고기나 초밥을 사서 자신의 집으로 가져다주는 등 배씨의 법인카드 사적 사용 사실을 묵인한 정황이 수사를 통해 드러나는 등 여러 간접 증거가 근거가 된 것으로 전해졌다.김씨가 배씨에게 법인카드 사적 사용을 직접 지시한 정황이 나왔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예방,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2. 8. 31 정연호 기자이재명은 검찰 송치 대상서 제외그러나 경찰이 김씨를 교사범 등이 아닌 공모공동정범으로 판단한 점을 고려하면 경찰 역시 김씨가 배씨에게 카드 사용 등을 직접 지시한 정황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경찰 관계자는 “이번 의혹과 관련해선 아직 수사가 마무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혐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서 “(법인카드 사용) 직접 지시 여부 등 수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경찰은 대선 공직선거법 사건 공소시효(9월 9일)를 고려해 일단 김씨와 배씨의 일부 혐의를 송치하는 것으로 1차 수사를 마무리 지었다.이번 송치 대상에 이 대표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1차 수사에 해당하는 법인카드 유용 등 과정에 이 대표가 관여한 정황이 현재로선 나오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부인 김혜경씨가 ‘법인카드 사적 유용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마친 뒤 23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경찰청을 나서고 있다. 2022.08.23 뉴시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 배우자 김혜경씨가 ‘법인카드 유용 의혹’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23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경찰청으로 출석하고 있다. 2022.08.23 오장환 기자더불어민주당이 31일 이재명 당대표의 부인인 김혜경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 사건이 검찰에 송치된 것과 관련, “무리한 송치이자 ‘답정너’ 수사에 매우 유감”이라면서 “김 여사는 법인카드 사용을 알지도 못했는데 공동정범 결론이 이미 정해졌던 것”이라고 비판했다.박성준 대변인은 이날 서면브리핑에서 “김 여사가 법인카드 사용을 알고 있다는 게 송치의 근거지만, 김 여사는 카드를 쓴 적이 없고 음식물 구입에 법인카드를 쓴 사실도 알지 못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이날 업무상 배임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김씨와 측근인 전 경기도청 별정직 5급 배모씨를 각각 불구속 입건해 검찰에 송치했다.김씨는 이 대표의 경기지사 당선 직후인 2018년 7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측근인 배씨가 경기도청 법인카드로 자신의 음식값을 치른 사실을 알고도 용인한 혐의(업무상배임)를 받는다.
법인카드 유용 의혹을 받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의원 부인 김혜경(가운데)씨가 23일 오후 경기남부경찰청에서 5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나오고 있다.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에 출석한 김씨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연합뉴스배씨의 법인카드 유용 규모는 총 150여건, 2000만원 상당으로 파악됐다. 이 가운데 김씨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법인카드 유용 액수는 20여건, 200만원 상당인 것으로 알려졌다.경찰은 배씨와 ‘윗선’으로 의심받은 김씨 사이에 범행에 대한 묵시적 모의가 있었다고 보고, 김 씨를 이 사건의 공모공동정범으로 검찰에 넘겼다.박 대변인은 “김 여사의 수행책임자도 모르게 김 여사의 동석자 식비를 배씨와 (사건을 제보한) 제보자 등이 결제한 사실이 그들의 대화 녹음에 또렷하다”면서 “그런데도 (김씨가) 공동정범이라니, 결론은 이미 정해졌던 것”이라고 비판했다.이어 “증거를 철저히 무시한 수사는 김 여사를 검찰 포토라인에 세워 모욕을 주고 괴롭히겠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어 유감”이라면서 “경찰이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각종 의혹에 줄줄이 무혐의 결론을 내는 것과 대비된다”고 지적했다.그러면서 “정치검찰도 모자라 경찰마저 불공정한 수사로 사법 정의를 파괴하는 데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2022.07.28박지환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혜경 씨가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과잉의전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2022. 2. 9 김명국 선임기자김혜경 측 “법인카드 사용 몰랐다”배모씨 “과잉 충성에 의한 일”경찰 “범행 모의한 공모공동정범”김씨와 최측근 배씨 특수성 주목앞서 김혜경씨가 경찰 소환조사를 받은 지난 23일 남편 이재명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법인카드를 쓰거나 부당사용을 지시·용인한 게 아닌데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고통을 겪는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한없이 미안할 뿐”이라는 글을 올렸다.이 대표와 김씨 측은 ‘법인카드 유용 의혹’이 처음 제기된 때부터 줄곧 “몰랐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법인카드 직접 사용자인 전 경기도청 별정직 5급 배모씨 역시 자신의 ‘과잉 충성’에 의한 일이라고 밝혔다.배씨는 의혹이 불거진 지난 2월 민주당을 통해 낸 입장문에서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7급 A(사건 최초 제보자)씨에게 요구했다”면서 “이 후보 부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상식적인 선을 넘는 요구를 했다”고 말했다.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의혹 사건, 배모 씨 영장실질심사 출석 -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의혹 사건의 핵심에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배우자 김혜경 씨의 측근 배모 씨(전 경기도청 소속 5급 사무관·별정직)가 30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으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들어가고 있다. 2022.8.30 공동취재그러나 이들의 해명과 달리 경찰은 이날 업무상배임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김씨와 배씨를 함께 송치하면서, 이 사건을 배씨의 단독범행이 아닌 김씨와 배씨의 공동범행으로 봤다.경찰은 그 근거로 김씨를 이 사건 ‘공모공동정범’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공모공동정범은 공범의 범위에 포함되는 개념 중 하나이다. 2인 이상이 범행을 공모해 그 중 일부 인원만 공모에 따라 범죄를 실행했다 하더라도 실제 행위를 하지 않은 공모자까지 함께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판단한다는 규정이다.1997년 대법원 판례에는 “비록 전체의 모의 과정이 없었다 하더라도 수인 사이에 순차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상통해 그 의사의 결합이 이뤄지면 공모 관계가 성립한다”면서 “이러한 공모가 이뤄진 이상 실행 행위에 직접 관여하지 아니한 자라도 다른 공범자의 행위에 대해 공동정범으로서 형사책임을 진다”고 명시돼 있다.
- 23일 오후 김혜경 씨가 ‘법인카드 유용’ 의혹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경기 수원시 장안구 창룡대로 경기남부경찰청에 들어가고 있다. 오장환 기자 경찰은 이번 사건에서 김씨와 배씨 관계의 특수성에 주목했다.배씨는 이 대표의 변호사 시절부터 성남시장, 경기지사, 대선 후보 시절까지 곁을 지키며 도운 최측근으로 분류된다.특히 김씨와 상당 부분 일정을 같이하며 사소한 일도 조율해 온 배씨가 이 대표 부부에게 흠이 될 수 있는 불법적인 일을 독자적으로 했으리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이 판단에는 김씨가 법인카드로 소고기나 초밥을 사서 자신의 집으로 가져다주는 등 배씨의 법인카드 사적 사용 사실을 묵인한 정황이 수사를 통해 드러나는 등 여러 간접 증거가 근거가 된 것으로 전해졌다.김씨가 배씨에게 법인카드 사적 사용을 직접 지시한 정황이 나왔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예방,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2. 8. 31 정연호 기자이재명은 검찰 송치 대상서 제외그러나 경찰이 김씨를 교사범 등이 아닌 공모공동정범으로 판단한 점을 고려하면 경찰 역시 김씨가 배씨에게 카드 사용 등을 직접 지시한 정황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경찰 관계자는 “이번 의혹과 관련해선 아직 수사가 마무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혐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서 “(법인카드 사용) 직접 지시 여부 등 수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경찰은 대선 공직선거법 사건 공소시효(9월 9일)를 고려해 일단 김씨와 배씨의 일부 혐의를 송치하는 것으로 1차 수사를 마무리 지었다.이번 송치 대상에 이 대표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1차 수사에 해당하는 법인카드 유용 등 과정에 이 대표가 관여한 정황이 현재로선 나오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부인 김혜경씨가 ‘법인카드 사적 유용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마친 뒤 23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경찰청을 나서고 있다. 2022.08.23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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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가 당서기가 될 때만해도 그에 대한 서방의 기대는 크지 않았다. 3년 사이 두 명의 서기장이 연달아 숨져 ‘어부지리’로 권좌에 오른 50대 중반에 서기장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당내 대표적인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는 취임사에서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외쳤다. 당 내부의 구태의연함과 부패, 노동생산력의 약화와 과학기술력의 저하 등 여러 산적한 문제를 풀기위해서는 각종 정보공개로 인한 사회 투명성 제고, 언론 자유 확보, 자율적 시장경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던 소련의 몰락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선언한 것이다.고르바초프는 집권 이듬해인 1986년 4월에는 “사회생활 모든 부분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모순 된 당과 사회 구조에 대한 전면적 개혁이 필요하며 이는 정보 공개와 민간 자율성을 증대하는 개방만을 통해 가능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 조치 이후 농장 책임자, 기업 대표자 등은 당의 지침에 따르지 않고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게 됐으며 1987년에는 무역의 국가 독점이 해제됐다. 암거래상들의 활동을 합법화했고 대신 세금을 내게 했다. 인위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비슷한 수준해서 맞췄던 것에서 벗어나 생산성에 따라 임금을 달리했다. 공산주의 국가에 신자유적 경제가 도입된 것이다.● 미소 냉전의 종언, 노벨평화상 수상‘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자’ ‘공산당 최후의 로맨티스트’ 등으로 불리는 고르바초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미소 냉전 시대를 이끌어낸 주역이다. 취임 첫해 말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갖은 재임 중 총 4차례 미소 정상 회담을 통해 서방과 동구권의 군비 경쟁에 제동을 걸었다. 1988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시켰고, 동구권의 사회주의 몰락을 묵인했다. 또한 1990년 7월 독일과의 정상회담에서 통일 독일의 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에 동의하면서 독일이 하나로 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소련은 서방 세계와도 수교에 나서며 빗장을 열었으며,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 때는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기도 했다.고르바초프는 폐쇄적이었던 소련을 개방시키고, 국제 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그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사설에서 “폴란드 헝가리로부터 체코슬로바키아 동독에 이르기까지 지난해 자유 열풍이 몰아칠 때 소련 안에서는 이 같은 자유의 물결을 분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런 의견을 물리치고 자유를 허용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캄보이다 사태에서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한소(韓蘇)수교에 이르기까지 그가 기울인 평화노력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만 하다”고 평가했다.●변화의 희생양이 되다
2004년 12월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에서 기자회견을 시작하면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AP뉴시스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극심한 혼란도 가져왔다. 능력주의 원칙의 적용은 극심한 임금격차와 대량해고를 가져왔다. 생산량은 늘었으나 유통망이 정비가 안돼 상품은 제때 진열되지 못해 서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개혁의 속도나 범위에 불만을 품는 보리스 옐친을 비롯한 급진파도 나타나 그를 위협했다. 고르바초프가 풀어준 언론 자유는 이제 그를 비판하는 날선 화살이 돼 되돌아왔다. 급기야 보수파가 1991년 8월 크림 반도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는 고르바초프를 급습해 연금시키고, 구(舊) 소련 체제의 복원을 선포했다.하지만 달콤한 자유를 한번 맛봤던 소련 민중들은 붉은 광장으로 몰려들었고, 보수의 구테타는 3일 천하로 끝났다. 고르바초프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는데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그해 12월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그의 정적이었던 옐친은 소련을 공식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이 이를 대신한다고 발표했다.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등 몇 차례 정치일선 복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99년 평생의 반려자이던 라이사 여사가 타계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고르바초프 재단을 만든 뒤 환경문제와 국제현안에 강의와 집필을 통해 의견을 피력했다.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폐쇄적인 국정 운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본인이 추구했던 개혁·개방 정책이 과거로 회귀하는 양상에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고르바초프는 “푸틴이 개혁을 가장해 공공의 재산을 편취하고 부패에 물듦으로써 국민을 배신하고 있다”며 “1990년 이후 러시아의 역대 선거는 소련 시절에 비해서도 자유롭지 못했다”고 강조했다.그는 85세 생일을 앞두고 2016년 러시아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는 러시아와 서방 간의 긴장 관계가 신(新)냉전으로 악화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신냉전은 사실상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누군가가 이 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라며 “우리(러시아)도 저들도(서방)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건설적 정책을 통해 평화로 나가는 방법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고르바초프는 “벌써 55년째 정치 속에 있으며 정치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후인 2016년 12월 13일 AP통신 등과 인터뷰에서는 “(트럼프가)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것이 좋을 수 있다”며 “러시아와 미국은 한 자리에 앉아 (관계 개선을 위한) 합의에 이를 때까지 대화해야 한다”며 미러 관계 개선을 촉구하기도 했다.●고르바초프, 한반도 통일을 얘기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에서 열린 첫 한소 정상회담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6월 4일 정상회담을 통해 한소수교에 합의했고, 그해 9월 30일 유엔본부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서명하며 한소수교가 이뤄졌다. 1884년 체결된 조러수호통상조약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1904년 파기됐고, 이후 86년 만에 다시 관계가 정상화된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탈냉전, 노태우의 북방정책이 호응한 결과였다.고르바초프는 수교 10주년을 맞아 2000년 본보와 가진 서면인터뷰에서 “(한국과의 수교는)국제관계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우리의 신사고와 새 대외정책 때문이었다. 또한 남북한 간의 적대관계 청산과 평화적인 대화, 민주적 통일은 한국인의 이해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때 그는 당시 수교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공개하기도 했다.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 만남의 의미와 목적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노 대통령은 상당히 조심스러워서 직설적으로 (수교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국제 정세와 동북아 정세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양국 관계가 발전할 준비가 돼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본심을 이해하게 됐죠.”
‘제17회 인촌 기념강좌’ 연사로 초청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세계정세와 한반도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2001/11/19 동아일보DB고르바초프는 2001년 11월 방한해 고려중앙학원 고려대학교 동아일보사 공동 주최 및 고려대 정책대학원 주관으로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인촌기념강좌에 참석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통일 논의에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규칙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남북간의 이해관계가 고려돼야 하며 대화가 선결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그는 “통일은 많은 정치적 문제를 야기한다. 남북간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인 문제도 작용한다. 통일은 정쟁이나 당쟁의 대상이 되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이어 “러시아는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 지렛대를 잃어버릴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면서 한반도 통일을 지지하기도 했다.고르바초프는 2016년 5월 제주도에서 열리는 제주포럼의 특별대담자로 참석해 ‘신냉전 위협과 공동 번영의 길’을 주제로 대담과 기조연설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건강을 이유로 막판에 불참의사를 밝혔다. 고르바초프는 당뇨 등 질환을 앓아왔으며 2016년 11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입원 수술을 받기도 했다.
고르바초프가 당서기가 될 때만해도 그에 대한 서방의 기대는 크지 않았다. 3년 사이 두 명의 서기장이 연달아 숨져 ‘어부지리’로 권좌에 오른 50대 중반에 서기장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당내 대표적인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는 취임사에서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외쳤다. 당 내부의 구태의연함과 부패, 노동생산력의 약화와 과학기술력의 저하 등 여러 산적한 문제를 풀기위해서는 각종 정보공개로 인한 사회 투명성 제고, 언론 자유 확보, 자율적 시장경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던 소련의 몰락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선언한 것이다.고르바초프는 집권 이듬해인 1986년 4월에는 “사회생활 모든 부분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모순 된 당과 사회 구조에 대한 전면적 개혁이 필요하며 이는 정보 공개와 민간 자율성을 증대하는 개방만을 통해 가능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 조치 이후 농장 책임자, 기업 대표자 등은 당의 지침에 따르지 않고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게 됐으며 1987년에는 무역의 국가 독점이 해제됐다. 암거래상들의 활동을 합법화했고 대신 세금을 내게 했다. 인위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비슷한 수준해서 맞췄던 것에서 벗어나 생산성에 따라 임금을 달리했다. 공산주의 국가에 신자유적 경제가 도입된 것이다.● 미소 냉전의 종언, 노벨평화상 수상‘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자’ ‘공산당 최후의 로맨티스트’ 등으로 불리는 고르바초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미소 냉전 시대를 이끌어낸 주역이다. 취임 첫해 말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갖은 재임 중 총 4차례 미소 정상 회담을 통해 서방과 동구권의 군비 경쟁에 제동을 걸었다. 1988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시켰고, 동구권의 사회주의 몰락을 묵인했다. 또한 1990년 7월 독일과의 정상회담에서 통일 독일의 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에 동의하면서 독일이 하나로 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소련은 서방 세계와도 수교에 나서며 빗장을 열었으며,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 때는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기도 했다.고르바초프는 폐쇄적이었던 소련을 개방시키고, 국제 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그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사설에서 “폴란드 헝가리로부터 체코슬로바키아 동독에 이르기까지 지난해 자유 열풍이 몰아칠 때 소련 안에서는 이 같은 자유의 물결을 분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런 의견을 물리치고 자유를 허용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캄보이다 사태에서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한소(韓蘇)수교에 이르기까지 그가 기울인 평화노력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만 하다”고 평가했다.●변화의 희생양이 되다
2004년 12월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에서 기자회견을 시작하면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AP뉴시스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극심한 혼란도 가져왔다. 능력주의 원칙의 적용은 극심한 임금격차와 대량해고를 가져왔다. 생산량은 늘었으나 유통망이 정비가 안돼 상품은 제때 진열되지 못해 서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개혁의 속도나 범위에 불만을 품는 보리스 옐친을 비롯한 급진파도 나타나 그를 위협했다. 고르바초프가 풀어준 언론 자유는 이제 그를 비판하는 날선 화살이 돼 되돌아왔다. 급기야 보수파가 1991년 8월 크림 반도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는 고르바초프를 급습해 연금시키고, 구(舊) 소련 체제의 복원을 선포했다.하지만 달콤한 자유를 한번 맛봤던 소련 민중들은 붉은 광장으로 몰려들었고, 보수의 구테타는 3일 천하로 끝났다. 고르바초프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는데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그해 12월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그의 정적이었던 옐친은 소련을 공식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이 이를 대신한다고 발표했다.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등 몇 차례 정치일선 복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99년 평생의 반려자이던 라이사 여사가 타계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고르바초프 재단을 만든 뒤 환경문제와 국제현안에 강의와 집필을 통해 의견을 피력했다.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폐쇄적인 국정 운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본인이 추구했던 개혁·개방 정책이 과거로 회귀하는 양상에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고르바초프는 “푸틴이 개혁을 가장해 공공의 재산을 편취하고 부패에 물듦으로써 국민을 배신하고 있다”며 “1990년 이후 러시아의 역대 선거는 소련 시절에 비해서도 자유롭지 못했다”고 강조했다.그는 85세 생일을 앞두고 2016년 러시아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는 러시아와 서방 간의 긴장 관계가 신(新)냉전으로 악화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신냉전은 사실상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누군가가 이 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라며 “우리(러시아)도 저들도(서방)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건설적 정책을 통해 평화로 나가는 방법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고르바초프는 “벌써 55년째 정치 속에 있으며 정치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후인 2016년 12월 13일 AP통신 등과 인터뷰에서는 “(트럼프가)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것이 좋을 수 있다”며 “러시아와 미국은 한 자리에 앉아 (관계 개선을 위한) 합의에 이를 때까지 대화해야 한다”며 미러 관계 개선을 촉구하기도 했다.●고르바초프, 한반도 통일을 얘기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에서 열린 첫 한소 정상회담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6월 4일 정상회담을 통해 한소수교에 합의했고, 그해 9월 30일 유엔본부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서명하며 한소수교가 이뤄졌다. 1884년 체결된 조러수호통상조약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1904년 파기됐고, 이후 86년 만에 다시 관계가 정상화된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탈냉전, 노태우의 북방정책이 호응한 결과였다.고르바초프는 수교 10주년을 맞아 2000년 본보와 가진 서면인터뷰에서 “(한국과의 수교는)국제관계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우리의 신사고와 새 대외정책 때문이었다. 또한 남북한 간의 적대관계 청산과 평화적인 대화, 민주적 통일은 한국인의 이해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때 그는 당시 수교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공개하기도 했다.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 만남의 의미와 목적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노 대통령은 상당히 조심스러워서 직설적으로 (수교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국제 정세와 동북아 정세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양국 관계가 발전할 준비가 돼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본심을 이해하게 됐죠.”
‘제17회 인촌 기념강좌’ 연사로 초청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세계정세와 한반도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2001/11/19 동아일보DB고르바초프는 2001년 11월 방한해 고려중앙학원 고려대학교 동아일보사 공동 주최 및 고려대 정책대학원 주관으로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인촌기념강좌에 참석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통일 논의에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규칙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남북간의 이해관계가 고려돼야 하며 대화가 선결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그는 “통일은 많은 정치적 문제를 야기한다. 남북간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인 문제도 작용한다. 통일은 정쟁이나 당쟁의 대상이 되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이어 “러시아는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 지렛대를 잃어버릴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면서 한반도 통일을 지지하기도 했다.고르바초프는 2016년 5월 제주도에서 열리는 제주포럼의 특별대담자로 참석해 ‘신냉전 위협과 공동 번영의 길’을 주제로 대담과 기조연설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건강을 이유로 막판에 불참의사를 밝혔다. 고르바초프는 당뇨 등 질환을 앓아왔으며 2016년 11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입원 수술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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