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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이었다. 들킨 이렇게 건 소리라 자야 아닌선운산 천마봉의 아찔한 벼랑 끝에 선 여행자가 저 아래 발밑으로 펼쳐지는 도솔암 일대의 경관을 굽어보고 있다.고창=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여행이 쉬운 곳, 고창의 다른 이야기
전북 고창은 ‘여행하기 쉬운 곳’이다. 준비 없이 떠나도 여정을 꽉 채운 코스를 쉽게 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행지 중 한 곳이다.
여행 코스를 한 번 쓱쓱 그려보자. 고창에 갔다면 뺄 수 없는 곳은 절집 선운사. 절과 함께 선운산 등반 코스를 끼워 넣는다면, 하루 일정은 그걸로 그냥 ‘끝’이다. 여기다 선운사 가는 길가에 늘어선 풍천장어 식당 중 한 곳을 골라 장어구이를 메뉴에 철거민 집어넣는다면 완벽하다. 너무 무성의한 게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첫 고창여행이라면 이보다 더 나은 코스는 없다.
자, 첫날 일정은 됐고 이제 여행 둘째 날이다. 필수 코스 선운사를 다녀왔다면 다음은 선택 코스다. 고창에는 고창읍성이 있고 운곡 람사르습지, 고인돌 유적지가 있으며 여름철에 해바라기와 백일홍, 황화 코스모스가 피는 경관 농업 농지취득 자격증명 신청 의 명소 학원농장이 있다.
고창에는 또 목장체험을 할 수 있는 상하농원이 있으며, 구시포에서 동호해수욕장에 이르는 광활한 ‘명사십리 해변’도 있다. 몇 곳을 골라 동선을 잇는 것으로 이튿날 일정도 꽉 채울 수 있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2∼3일쯤의 여행 코스를 쉽게 짤 수 있다는 건, 내로라할 압도적 여행 명소가 있는 것 한국장학재단 생활비대출 지급 뿐만 아니라 저마다 다른 취향을 만족시켜 줄 만한 다채로운 여행 자원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도움 없이도 스스로 일정을 짤 수 있을 만큼 잘 알려진 기왕의 명소를 구태여 다시 말하는 대신, 이번에는 알려지지 않은 고창의 소소한 곳들을 골라 소개하기로 한다.
# 팽나무 한 그루가 그려내는 그림
신차 싸게사는법 고창군과 부안군과의 경계에 ‘고창군 부안면’이 있다. 부안군이 있고, 고창군 부안면이 있으니, 헷갈리기 쉽지만 한자가 다르다. 부안군은 ‘扶安’으로 쓰는데, 고창 부안면의 부안은 ‘富安’이다.
고창군 부안면 얘기를 꺼내놓는 건 순전히 ‘수동리 팽나무’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수동리 팽나무는 200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이 400살을 넘 금계산계곡 긴 노거수(老巨樹)다.
나무 높이는 12m로 나이에 대면 그리 크지 않지만, 활개 치듯 펼친 나뭇가지 폭이 동서로 22.7m, 남북으로 26m에 달한다. 벌리고 선 가지의 폭이 제 키의 두 배쯤 되는 셈이다. 가슴높이 나무 둘레도 6m에 달한다.
팽나무는 느티나무 못잖게 노거수가 많은 수종. 하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우는 드물다. 군락이 아닌 팽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이 된 건 전국에서 딱 네 그루. 여기 수동리 팽나무 외에 ‘세금 내는 나무’로 이름난 예천의 황목근, 드라마에 등장해 유명해진 창원 북부리의 이른바 ‘우영우 팽나무’, 그리고 군산 하제마을 팽나무가 천연기념물이다.
수동리 팽나무는 수형도 훌륭하고, 나무의 기운도 좋다.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 문화재청은 지정 이유를 ‘천연기념물 지정 팽나무 중에서 흉고 둘레가 가장 크며 수형이 아름답고 수세가 좋은 편이어서 팽나무 종을 대표할 만하다’고 기록했다. 그래서 수동리 팽나무에 붙여진 별명이 ‘대장 팽나무’다.
수동리 팽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안녕을 빌었던 당산나무였다. 바다라고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지금은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간척 사업 이전에는 바닷물이 팽나무 아래까지 넘실거렸단다. 그 시절, 바다를 굽어보는 당산나무는 얼마나 근사했을까. 팽나무 뒤로 지는 노을은 또 얼마나 멋졌을까.
수동리 팽나무는 지금쯤이 구경하기 딱 좋을 때다. 나무 주변으로 무릎까지 자란 초록의 풀이 마치 융단처럼 깔려 있어서다. 나무 앞의 평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인생사진’ 한 장쯤은 손쉽게 남길 수 있다.
팽나무가 있는 부안면은 고창 북쪽에 있다. 부안면에는 서정주 생가와 미당시문학관이 있다. 서정주의 시집 ‘질마재신화’에 나오는 질마재도 부안면이다. 팽나무 한 그루 보려고 따로 시간을 내기보다는, 고창에 들고나는 길에 자연스럽게 들러가거나, 미당시문학관 등과 연계해 다녀오는 편이 좋겠다.
고창군 심원면 만돌리의 서해안바람공원 앞 갯벌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저물 무렵, 고창의 바다 어디든 가면, 이런 경관을 만날 수 있다.
# 취석정에서 느껴보는 도연명의 풍류
이번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되 마루에 앉는 것만으로도, 세상 부러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근사한 정자 얘기다.
고창읍 남쪽에 노동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수면 위에 부교를 띄워 걸어서 건널 수 있도록 만든 ‘노동수상길’을 조성해 주민들의 발길을 모으는 곳이다. 저수지 제방 아래 ‘자연마당’이란 이름의 꽃밭을 조성해 놓기도 했다. 지금 꽃밭에는 보라색 버들마편초가 한창이다.
노동저수지 상류에 정자 ‘취석정’이 있다. 자그마한 물길을 끼고 있는 아담한 정자인데, 수백 년 된 늙은 소나무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어 길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취석정은 이 지역의 선비 김경희가 지은 정자다. 김경희는 조광조와 외삼촌 양팽손에게서 글을 배워 시문이 뛰어났다는데, 을사사화에 연루되는 바람에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벼슬길이 막히자 김경희는 을사사화 이듬해인 1546년에 취석정을 짓고 지역의 선비들과 여기서 시를 지으며 은거했다. ‘취석(醉石)’이란 정자 이름은 중국 시인 도연명이 한가로이 세상을 살 때 술에 취하면 잠들었다는 집 앞의 바위에서 딴 이름이다. 한평생 욕심 없이 한가롭게 살아가겠다는 뜻을 정자에 매달아 놓은 셈이다.
정자는 풍류가 넘친다. 살짝 퇴락한 듯하지만 워낙 정갈하게 관리해서 그런지, 갓 세수를 한 얼굴처럼 수수하면서도 말갛다. 기둥이며 난간, 마루의 나뭇결이 생생하다. 정자의 정취를 더해주는 건 낮은 담장 안에 마치 정원석처럼 있는 7개의 고인돌이다. 담장 밖에도 3개의 고인돌이 더 있다. 정자 주인은 아마도 고인돌에서 도연명이 취해 잠들었던 ‘취석’을 보았던 것이리라.
취석정의 문은 늘 열려 있다. 도연명처럼 여기서 술에 취하는 건 안 될 말이지만, 정자에 앉아 보온병에 담아간 차 한잔을 마신다면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마침 장맛비라도 내려 정자에 앉아 빗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금상첨화겠고….
# 문장으로 만든 조선의 ‘타임캡슐’
이번에는 고창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인물 얘기다. 조선의 책벌레, 또는 공붓벌레로 불리던 고창 출신의 18세기 인물이 있다. 조선 영·정조 때 실학자 황윤석이다. 박물학자인 그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 글을 썼다. 그렇게 쓴 책이 ‘이재난고’다. 이재는 황윤석의 호. 난고(亂藁)란 ‘어지러운 원고’라는 뜻이다.
이재난고는 황윤석이 열 살 되던 해인 1738년 쓰기 시작해 예순셋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이틀 전인 1791년 4월 15일에 끝난다. 자그마치 53년 동안 이어진 글이다. 책으로 묶인 게 60여 권, 원고지로 세면 2만9000여 장이고, 글자 수로 따지만 527만4000자다.
이재난고는 그냥 단순한 일기가 아니다. 그날그날 자기가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한 내용을 다 글에 담았다. 어학, 역사학, 성리학, 지리학, 천문학, 의학 등을 포괄한다.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여진어, 심지어 태국어까지 연구했고 제주 방언도 차곡차곡 정리했다. 형식도 다양하다. 어떤 건 비망록이며, 어떤 건 연구노트이기도 하고, 생생한 생활일기도 있다.
이재난고를 흔히 ‘조선의 타임캡슐’이라 부른다. 그런 평가에 공감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이 이재난고에 있다. 바로 배달음식 얘기다. 책에는 황윤석이 1786년 7월 과거를 치르고 일행과 점심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국내 최초, 아니 세계 최초로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배달음식의 기원이다.
수령 400년을 헤아리는 수동리 팽나무.
# 그 시절 짚신은 얼마나 했을까
이재난고에는 당시 여관의 숙박비며 국밥 가격, 현감 월급, 말 대여료, 심지어 사냥으로 잡은 중간 크기 호랑이 가격까지 나온다. 기록으로 드러나는 조선의 생생한 모습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치가 비슷한 물건의 가격을 비교해 화폐가치를 맞춰보면 250년 전의 물가 수준을 지금과 대비해볼 수 있다. 그 시절의 물건 가격을 아는 것만으로도 조선 후기의 생활 모습이 영사기로 담아낸 듯 생생하게 느껴진다.
황윤석이 이재난고에 기록한 1768년 한성(서울)의 쌀 한 말 가격은 1냥. 지금 20㎏ 쌀 한 포대가 5만 원이니, 1냥을 5만 원이라고 치면 당시 다른 물건의 가격을 지금 시세로 얼추 환산해 추정해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당시 닭 한 마리는 1만1500원이고 약값은 2만 원, 양반 갓 5만 원, 감투라 불리는 탕건 35만 원, 짚신은 2500원, 누빔 속옷 20만 원이다. 지금으로 치면 자동차 격인 튼튼한 말 한 마리 가격은 200만 원이었다.
고창읍 월곡뉴타운에는 유현준 건축가가 설계를 맡아 화제가 된 ‘고창 황윤석도서관’을 신축 중이다. 상반기 중 완공이 목표라는데, 도서관 건물의 뼈대는 다 지었고, 내부 공사가 한창이다.
가장 많은 책을 읽고, 가장 많은 책을 썼던 황윤석. 죽기 이틀 전까지도 일기를 썼을 만큼 기록과 글쓰기에 미쳐 있었던 그의 이름은, 도서관에 더없이 적절해 보인다.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는 황윤석 생가가 있다. 젊어서 벼슬살이를 위해 잠깐 고향을 뜬 것 말고, 그는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본래 생가는 1909년 일본군의 의병 토벌 과정에서 불타버려 그해 다시 복원했으나, 이후 1970년에 철거돼 사라졌다. 지금의 생가는 2005년 발굴 조사로 유구를 확인해 2021년 복원한 것이다.
집은 사랑채와 문간채, 안채가 남아 있는데 모두 전형적인 남부지방 초가다. 황윤석은 기와로 지붕을 덮으면 혈이 눌려 집안이 좋지 않다는 풍문을 믿어 초가집을 고집했다고 전해진다. 소박하면서 고즈넉한 초가집의 분위기가 호기심과 꼼꼼함을 밑천으로 삼은 그의 학문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여관에서 요정, 식당을 거쳐 카페로
고창에는 누구든 소매를 붙잡아 데려가고 싶은 찻집이 몇 곳 있다. 건물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로 보나, 지역의 대표성으로 보나 가장 먼저 얘기해야 할 곳은 고창읍의 ‘조양관’이다. ‘아침 조(朝)’에 ‘볕 양(陽)’ 자. 조양관(朝陽館)은 ‘아침 볕이 가장 먼저 비추는 집’이란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여태 남아 있는 고창의 근대건축물은 딱 세 개다. 아직도 현역인 고창고 강당, 고창의 만석꾼 김연수가 설립한 옛 삼양염업사 해리지점, 그리고 지금은 카페로 변신한 읍내의 조양관이다.
조양관 건물은 1935년 일본식 기와를 얹은 2층 일식여관으로 지어졌다. 본래 ‘국일여관’이란 간판을 달고 잠도 재워주고 밥도 차려주던 이른바 ‘일본식 료칸(旅館)’이었다. 해방되고 6·25전쟁이 끝난 뒤에 이 여관을 최계월이 인수했다.
최계월은 전북 전주의 유명했던 요정 ‘행원(杏園)’의 주방책임자였다. 본래 소리를 잘하던 행원의 기생이었는데, 목에 이상이 생겨 소리를 할 수 없게 되자 주방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잠깐, 전주의 ‘행원’ 얘기를 해보자. 행원의 뿌리는 1928년 전주에 설립된 ‘낙원 권번’이었다. 권번이란 1890년대 조선 시대 관기(官妓) 제도가 폐지된 후, 조직된 전주의 기생조합이었다. ‘전주의 마지막 기생’으로 불리던 허산옥에 의해 낙원 권번은 ‘행원’이란 요정이 됐다. 행원은 1983년 한식당으로 바뀔 때까지 전주에서 첫손에 꼽히던 대표 요정이었다.
‘행원’ 출신 최계월이 인수한 고창의 조양관도 1980년대까지 고창에서 가장 이름난 요정으로 번창했다.
전주에 행원이 있었다면, 고창에 조양관이 있었다. 조양관 앞으로는 고창천의 물길이 흐르는데, 벚꽃 흐드러진 봄밤이면 불 켜진 조양관 2층 연회장에서 노랫가락이 끊이질 않았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풍류와 운치가 듬뿍 느껴지는 정자 취석정.
# 등나무 덩굴 우거진 찻집의 툇마루
전주의 행원과 고창의 조양관이 사양길을 걷기 시작한 건 이른바 ‘룸살롱’이 등장해 요정의 수요를 흡수하면서부터다. 행원도 바뀌고, 조양관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정식을 차려 내는 고급 음식점 ‘조양식당’으로 탈바꿈했다.
‘조양식당’은 고창 사람들이 특별한 날에나 겨우 가보는 최고급 음식점이자 지역 주민들이 공유하는 ‘집단기억’ 속의 공간인 듯했다. 고창 사람에게 ‘그 시절 조양식당’ 얘기를 물으면 십중팔구 아련한 표정으로 저마다의 추억을 꺼내놓는다.
조양식당 건물은 2007년 ‘읍내에 남은 유일한 일본식 주거시설’이란 가치를 평가받아 등록문화재가 됐다. 식당으로 운영 중인 건물이 문화재로 등록된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문화재 지정 이후에 건물에 덧입혔던 빨간 벽돌을 걷어내고, 새로 매단 창틀도 뜯어내서 조양관은 과거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2024년 7월 ‘조양관’이란 이름을 내건 복합문화공간 겸 카페가 됐다. 요정에서 한정식 식당으로, 다시 2017년 카페로 변신한 전주의 ‘행원’의 행로를 똑같이 따라간 셈이다.
조양관은 출입 동선이 건물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도록 돼 있는데, 건물 옆 좁은 통로를 지나면 등나무 덩굴이 휘감고 있는 넓은 마당이 나타난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마당을 바라보고 ‘ㄱ’ 자로 들어선 건물은 툇마루를 놓은 여러 칸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본래 여관으로 지어진 건물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는 구조다. 2층은 칸막이가 없는 개방 공간인데, 여기서 내려다보는 마당이 운치 있다.
줄곧 조양관이라고 썼지만, 지금은 고창의 조양관을 조양관이라 부르지 못한다. 고창의 조양식당을 운영하던 옛 주인이 그 상호를 들고 서울 강남으로 가 고급 한정식 식당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조양관이 ‘조양관’이란 상호를 상표 등록하면서 고창의 카페에서는 상호를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대신 붙인 이름이 ‘옛도심카페’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고창 사람들은 지금도 다 ‘조양관’이라 부르긴 하지만 말이다.
# 명당에 앉아 달을 낚시질하다
고창읍 월산리에는 구름 속의 반달 같은 명당, 즉 ‘운중반월(雲中半月)’의 자리가 있다. 도선국사의 풍수 예언서에 등장하는 ‘최고의 명당’이란다. 그 자리에 한옥 ‘경운장(耕雲莊)’이 있다. 밭을 갈 듯 ‘구름(雲)을 간다(耕)’는 뜻의 택호(宅號)다.
사랑채 현판에 새긴 경운장이란 이름은 ‘구름을 갈고 달을 낚시질한다’는 명나라 때 시인의 시 구절 ‘경운조월(耕雲釣月)’에서 가져온 것. 명당의 지세와 사랑채 현판에 동시에 등장하는 ‘구름’과 ‘달’은, 신선처럼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풍류를 즐기겠다는 집주인의 의지로 읽힌다.
이 집의 주인은, 조선을 대표하는 마지막 유학자라는 노사 기정진에 학맥을 댄 조덕승. 1873년에 나서 1960년에 죽었으니 일제강점의 한복판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자연으로 물러나 앉은 건, 여기 고창이 실패한 혁명인 동학의 진원지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호남은, 아니 그중에서도 고창은 실패한 혁명이 만들어낸 난세의 중심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경운장은 후손들이 고향을 뜨면서 오랫동안 비워져 잡풀에 묻혀 있다시피 했는데, 언론인 출신인 후손이 3년여 전쯤 고택을 활용하겠다는 지역의 문화활동가들에게 무상으로 빌려주면서 새롭게 단장됐다. 집을 넘겨받은 이들이 귀촌·귀농협의회를 중심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1년6개월여의 리모델링 기간을 거쳐 2023년 9월 한옥 카페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에 여관 건물로 지어졌다가 요정, 식당 등을 거쳐 카페가 된 고창읍의 조양관.
# 농촌 풍경에 스민 이국적인 카페
경운장은 감각적이거나 가벼운 느낌은 아니다. 한옥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가 스며 있다. 아기자기하다기보다는 선이 굵으면서 격조와 깊이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경운장에는 안채에 딸린 방의 문 하나하나에 유학자 조덕승의 문집에서 꺼낸 듯한 글귀와 뜻풀이를 새겼다. 방 하나에는 ‘철수화농(鐵樹華濃)’이라 적고, 그 뜻을 이렇게 풀었다. “쇠로 된 나무에 꽃이 피기를 바라랴. 쇠처럼 단단한 건강으로 인생을 진하게 피우시길 축원하는 글.” 그 옆방 문에는 ‘발정시인(發政施仁)’이란 글씨와 함께 “훌륭한 정치와 인(仁)을 베풀면 백성들이 모여든다는 뜻”이라 적었다.
경운장 근처의 ‘사랑새봄’은 ‘농부의 카페’를 자처하는 곳이다. 귀농한 부부가 서툰 농사를 줄이는 대신, 카페 문을 열었다. 지역의 식재료를 고집하고 특산물로 만든 메뉴를 낸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 들어선 유럽 스타일의 카페라 이질적일 것 같은데, 모내기를 끝낸 논이나 복분자밭을 끼고 있는 카페는 우리 농촌 풍경과 딱 맞는 퍼즐처럼 어울린다.
요즘 카페는 웬만한 운동장 크기쯤 되는 베이커리 카페가 대세인데, 여기는 작은 테이블 네다섯 개로 내부가 꽉 찰 정도로 아담하다. 내부 장식은 감각적이면서도 한편으로 간결하다. 꾸몄으되 과도하다거나 치렁치렁한 느낌이 전혀 없다. 처음 온 손님도 금방 편안한 느낌이 드는 이유다.
■ 여름이라 더 좋은 선운산
선운산 천마봉이 보여주는 최고의 풍경. 선운사 늦봄은 동백이고, 초가을은 꽃무릇, 늦가을은 단풍이다. 그렇다면 여름은? 녹음이 우거진 선운사도 참 좋다. 선운사를 다녀가는 길이라면 선운산에 꼭 올라보자. 여행자에게 최고는 선운사∼도솔암∼천마봉∼낙조대∼용문굴 코스다. 천마봉에 오르는 철계단이 좀 가파르긴 하지만, 다 오르면 ‘선운산 최고의 풍경’이 보상처럼 기다리고 있다.
박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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