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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드라마와 법정 드라마가 그토록 많은 건 의사와 변호사라는 전문직 종사자들에 대한 선망과 기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전문직 드라마에 변화가 감지된다. 드라마에서도 그저 평범한 회사원과 다를 바 없는 의사와 변호사가 등장하고 있다.
tvN 법정 드라마 《서초동》은 어딘가 미심쩍다. 우리가 익숙하게 봐 온 법정 드라마라면 주인공은 법정에서 의뢰인을 변호하는 모습으로 멋지게 문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르다. 주인공 안주형(이종석)의 등장부터가 그렇다. 법정 대신 안주형의 평범한 출근길이 그려진다. 법무법인 경민의 9년 차 '어쏘 변호사(로펌에 고용돼 월급을 받는 변호사)'지만 외제차는 고사하고 지하철로 출근한 개인회생자격 다. 사무실에 들어간 그는 자기 자리에 앉아 습관처럼 영양제를 먹고 안경을 낀 후 긴 한숨을 내뱉으며 이렇게 말한다. "아, 하기 싫어."
드라마 《서초동》은 어찌 보면 평범한 직장인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변호사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별 야망도, 뜻도 없이 자괴감만 늘어가는 조창원(강유석)은 같은 건물 변호사 친구들과 밥 먹고 새마을금고연합회 수다 떨 때만 초롱초롱해지는 변호사다. 배문정(류혜영)은 변호 업무보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갈 맛집 검색에 더 진심인 변호사다. 하상기(임성재)도 일보다 주식과 블로그에 더 열성이다.
안주형이라고 다를 게 없다. 다른 이들보다 자신이 맡은 사건에 더 진심을 드러내긴 하지만, 정의나 공익에 과도하게 집착하던 '초짜' 변호사 시절은 지났다. 시불변시스템 심지어 의뢰인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연에 빠져들지 않는 냉정함을 보인다. 9년 차 어쏘 생활을 하며 의뢰인의 감정이나 승패에 과하게 몰입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게 돼서다.



tvN 드라마 《서초동》 포스터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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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드라마'도 일상의 행복을 더 추구하는 시대
회사를 그만두는 동욱(김경남)이 후임 변호사 강희지(문가영)에게 특별 인수인계 사항으로 전달한 내용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생활밀착형 직장인인가를 파악할 수 있다. '밥, 수다' '힐링 스폿' '맛집' '예금·적금, 개인연금, 소득공제', 그리고 맨 마지막에 순서 제2금융은행 대로 '어려운 사건'을 적어놓았다. 사건보다 밥과 수다, 힐링 스폿, 맛집 같은 것들이 이들에게 더 중요한 일상이라는 걸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래서 드라마 초반에 법정만큼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배문정이 검색해 찾아간 맛집에서 음식을 먹는 모습이다. 콩나물국밥을 어떻게 먹어야 맛있고, 두부김치찌개는 두부에 간이 배어야 맛있다며 바빠도 기다려서 먹는 모습이 그려진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함께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음식점 거리를 걸어오는 직장인의 일상을 묘사한 장면들은 이 작품의 메인 사건과 관련 없어 보이지만 드라마는 애써 그런 장면들을 자주 채워넣는다. 그건 이 작품이 회당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법정 드라마이긴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평범한 일상 또한 중요하게 다룬다는 뜻이다.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밸'이 요즘 직장생활의 달라진 가치관이라면, 이 독특한 법정 드라마도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밸형 법정 드라마라고나 할까.
이 법정 드라마를 보면 떠오르는 의학 드라마가 있다. 바로 최근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이라는 스핀오프를 탄생시켰던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율제병원에서 일하는 익준(조정석), 정원(유연석), 준완(정경호), 석형(김대명), 송화(전미도) 5인방의 의사 생활을 그린 작품이다. 각 과에서 최고의 의사로 존경받는 이들은 둘도 없는 친구들이다. 함께 모여 밴드 활동을 하기도 한다. 한 편에서는 의사와 환자의 생명을 오가는 긴장되고 또 먹먹하기도 한 치열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이들의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우정과 사랑의 일상사가 그려진다. 돈도 잘 벌고 존경까지 받는 의사들이지만 병원장 같은 감투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는 이들이 진짜 행복을 느끼는 건 함께 모여 떡볶이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밴드 내 역할 분배로 티격태격하면서 합주하는 순간들이다.
의사들의 이런 모습이 뭐 그리 대단한 변화일까 싶지만, 한때 의학 드라마들이 보여줬던 무게감과 카리스마, 성인에 가까운 헌신 같은 것들을 비교해 보면 그 변화는 더 두드러진다. 일본 의학 드라마를 리메이크해 국내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하얀거탑》이 대표적이다. 병원 내 서열 정상에 서기 위해 밀실에서 계획을 세우는 의사들은 권력욕의 화신처럼 비쳤다. 《허준》은 의원을 초인적 인물로 그려냈고, 《낭만닥터 김사부》는 물밀듯 밀려드는 응급실 환자들을 위해 살아가는 헌신적인 의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까지로 이어졌다. 그러니 워라밸을 추구하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의사들은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서초동》은 법정 드라마지만 이 계보를 이어받은 작품처럼 보인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변호사 버전 같은 느낌이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스틸컷 ⓒtvN


정의의 사도 또는 빌런, 이분법을 넘어선 변호사
법을 다루는 변호사는 지금껏 드라마에서 두 부류로 나뉘어 그려졌다. 한 부류는 정의의 사도다. 억울한 피해자들을 위해 싸우는 이 변호사들은 돈과 권력으로 불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부조리한 세상과 맞서 싸운다. 《동네 변호사 조들호》나 《날아라 개천용》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그렇다.
스릴러 같은 장르에서 변호사는 범죄자들을 변호하는 '빌런'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의뢰인을 변호하는 것이 이들의 일인지라, 어떤 의뢰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일의 성격도 달라진다. 《개과천선》 같은 법정 드라마는 약한 서민들을 짓밟는 일에 앞장섰던 거대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 김석주(김명민)가 우연한 사고로 기억을 잃은 후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약자들을 위해 싸우는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변호사의 양면성을 잘 포착했다.
그러나 정의의 사도 아니면 '빌런'으로만 그려지던 변호사의 모습은 최근 법정 드라마에서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들도 직장인'이라는 생계와 생존의 요소들이 더해지게 되면서다. 《하이에나》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에서 정금자(김혜수) 같은 변호사는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하이에나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정의의 사도도, '빌런'도 아닌 생존형 직장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사실 의학 드라마와 법정 드라마가 한국 드라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다. '전문직 드라마'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의사와 변호사는 전가의 보도처럼 통하던 직종이었다. 우리 사회가 지닌 전문직에 대한 선망 때문이다. 법대와 의대가 최고의 목표로 세워지는 입시 현실이 아닌가.
이런 선망이 지금의 대중들에게도 여전히 작동할까. 의사와 변호사 같은 직업은 이제 특정 부류의 삶을 갖게 된 이들의 특권처럼 손에 닿지 않는 것이 돼버렸다. 선망의 대상이 아닌 의사와 변호사를 내세우는 드라마가 그들만의 이야기로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이제 의학 드라마, 법정 드라마에도 평범한 직장인의 서사가 들어오게 됐다. 그들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직장인이고, 그래서 워라밸이 더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