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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일본 오사카부에 거주하는 김병진씨가 지난달 23일 본보와 화상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다원 기자


"여기도 무척이나 힘드네요. 어떻게든 견디는 거죠."
서울에서 840km 떨어진 일본 오사카부 사카이시. 40년 세월의 흔적이 깃든 다다미방을 배경으로 김병진(70)씨는 카메라 건너 기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본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오사카에서 살아온 재일교포 3세지만 무더위를 걱정하는 그의 말투엔 한국 토박이의 정감이 묻어 있었다.
책장에 빼곡한 서류철과 서적들은 한때 그의 꿈이 국어학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한국인을 향한 차별을 피해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며 자리를 잡아가던 청년 김병진의 한국 생활은 19 단기연체기록 88년 한 책의 등장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과거가 됐다. "출간된 뒤엔, 열어보지도 않았어요."
병진씨의 반응은 일주일 전 만난 박남일(69)씨와 닮아 있었다. 그에게도 두 번은 읽기 힘든 책이 있다고 했다. 7월 장대비를 피해 인천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그는 '식구들도 책을 봤느냐'는 물음에 "혼자 읽고 버렸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우리은행 주택담보대출 도 단어 하나하나를 모조리 기억하는 듯했다.
두 사람이 언급한 책들은 모두 한국 사회의 '간첩'을 폭로하며 2000년대 전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주인공은 병진씨와 남일씨네 가족이다. 서울의 봄을 틈타 활동한 재일교포 간첩이 바로 병진씨다. 군사분계선 바로 밑 강화군 교동도가 고향인 남일씨의 형은 1977년 북한에 국가기밀을 넘겼다고 나온 신용불량자회복카드 다.
이런 줄거리가 '조작'으로 판명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그러나 정작 사건을 날조한 공로로 국가에서 상을 받은 이들에게 별다른 처벌은 없었다. 사건 직후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그들의 위세가 무서워 고소를 망설였고, 시간이 지나선 공소시효가 발목을 잡았다.
현재로선 가해 공무원이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하도록 하는 개인회생 개인파산 게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배상금 상당액은 세금으로 충당되고, 가해자의 유공 기록은 부분적으로 공개되고 있었다. 한국일보는 두 남자의 사연을 통해 기형적인 국가배상 구조를 따져봤다.

①간첩 조작 피해자가 공안당국의 실상을 폭로하다

"당신이 잘 아 흡수합병 는 학생이 데모에 가담해 근처 파출소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요? 내가 재일 한국인이란 건 알고 있습니까?" "알다 마다". 등이 떠밀려 포니 뒷좌석에 올라탔다. 집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한강대교를 건너려고 할 때서야 목적이 나를 잡아가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보안사: 어느 조작 간첩의 보안사 근무기> 中

책 내용은 1983년 시작되지만, 동포 사회에서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이 돈 건 1971년 '서승 간첩 사건'이 계기였다. 병진씨는 '없는 일을 지어낼까' 싶었어도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안 된다"는 할머니의 만류에 1980년에야 서울 유학을 갈 수 있었다.
풍문 속 서울 용산구 서빙고 분실을 목도한 건 아들의 100일 잔치를 앞둔 1983년 7월이었다. 퇴근길에 끌려간 그곳에서 병진씨는 간첩이라는 생경한 혐의와 맞닥뜨렸다. "전기 고문을 당하다가 지하로 끌려갔는데 물소리가 들려요. 한강으로 통하니 쥐도 새도 모르게 흘려버린다고 하더군요."
일시 귀가와 재구금, 고문을 반복하며 3개월간 이어진 수사 결론은 '간첩망 16명 일망타진'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됐다. 보안사는 병진씨가 일본에서 활동했던 한국학생모임이 김일성 지령을 받는 반국가단체란 결론을 만들어 놓고 갖은 고문으로 그럴싸하게 조서를 꾸미고 있었다.



1981년 연세대 윤동주 시비 옆에서 김병진씨가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김병진씨 제공


병진씨에겐 공소보류(2년간 감시·보도를 조건으로 한 국가보안법상 불기소) 처분이 나왔다.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는 병진씨 탓에 법정에서 사건 조작이 들통날 것을 우려한 보안사가 내놓은 타협책이었다. 보안사는 대신, 명문고를 나오고 한국어에 능숙한 그를 '통역 특채'로 써먹기로 했다.
수차례 거절했지만 "아들을 애비 이름도 모르게 고아원에 보내겠다"란 얘기를 들은 탓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자괴감은 매일 커졌다. 지옥 같은 조사실에서 의지할 사람은 병진씨밖에 없다는 듯 "시키는 대로 하면 풀어줍니까?"라고 묻는 재일동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병진씨는 보안사의 실태를 폭로해 복수하기로 했다. 2년간의 강제근무를 마친 그날로 일본으로 탈출하자마자 펜을 들었다. 수사2계가 간첩 조작의 핵심이며 그중에서도 고병천 준위가 실세이고, 어떤 수사관이 무슨 사건을 맡아 승진했는지 기록했다. 피해자들 이름도 최대한 실명으로 적었다.
책이 나간 후 병진씨는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 대상에 올라 2000년에야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많은 간첩 조작 피해자들이 병진씨 책 덕에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일본판은 아사히신문사 논픽션 대상 우수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보안사' 김병진 저. 박시몬 기자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국가는 병진씨의 상선이란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서성수씨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주게 되자 2022년 고병천에게 구상금을 청구했다. 가해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였지만, 법원은 "불법행위를 적극 주도한 것으로 보기 부족하다"며 물리쳤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에게 나가는 배상금에서 고병천이 사비로 내야 할 몫은 한 푼도 없게 된다. 오로지 세금으로만 지급된다는 뜻이다. 서성수씨가 보안사의 불법수사로 억울한 옥고를 치른 사실이 재심과 국가배상소송에서 인정됐는데도 정작 고문 수사관은 아무런 사법적 책임을 지지 않게 됐다.
병진씨는 상급자를 내버려두고 고병천에게만 구상권을 행사한 정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병천은 '간첩 검거 유공'으로 포상을 받았지만, 구체적 사유는 확인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자신을 고문한 수사관이 누군지도 모르고 당했어요. 하지만 국가가 아는 건 쉽잖아요. 추재엽은 구청장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②고문기술자가 간첩 조작을 애국으로 포장하다

'이북에 있는 숙부가 간첩으로 나와 활동하다가 검거돼 옛날 조개잡이 사건을 진술했다'고 하자 놀라며 "그렇지 않아도 불안 속에 살아왔다"며 자백하기에 이르렀다. '과업이 그것 뿐인가!' 추궁하자, 사촌동생을 포섭했는데 이북에 가면 공부도 할 수 있다고 설득해 입북 대기 중에 검거됐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中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에겐 '1970~80년대 보안사에 고병천이 있었다면, 치안본부(현 경찰청)엔 이근안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남일씨는 1978년 2월 새벽에 형 남훈씨를 끌고 간 사복 괴한 3명이 인천 강화경찰서 경찰관이었다는 사실을 3개월 뒤 열린 형의 형사재판에서 알게 됐다.
남자들의 인상 착의를 수차례 설명했는데도 집 근처 파출소에선 "찾아볼 테니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강화서까지 찾아가 "우리 형님 잡아갔느냐"고 따졌지만, 경찰관들은 "그럼 들어와 찾아보라"며 태연하게 굴었다. 알고 보니 남훈씨는 경찰서에서 200m 떨어진 여관에 감금된 상태였다.
달이 넘어가자 동네에선 '이북으로 납치된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왔다. 눈물바람으로 교동도를 배회하던 어머니는 장남이 인천교도소에 수감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에 아연실색해 면회를 갔다. 몇 달 만에 본 형의 얼굴은 멍투성이. 모진 고문 흔적이 역력했다.



박남일씨가 지난달 16일 인천 중구 한 카페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피고인석에 선 건 남훈씨만이 아니었다. 1년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한 육촌형 남선씨가 옆에 있었다. 검사는 남선씨가 13년 전 서해 비무장지대 인근에서 조개를 잡다가 납북됐던 일을 거론하며 "박남훈은 박남선이 북한공작원으로부터 포섭된 사실을 알고도 방관하며 동조했다"고 했다.
어로한계선에 대한 인식이 명확지 않아 분계선 근처 조업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법정엔 두 사람의 허위 자백이 조서로 제출됐다. 첫 재판은 "고문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고 양심고백하는 남훈씨를 향해, 남선씨가 "간첩이라고 하면 집에 보내준다는데 왜 그러냐"며 가로막고 싸우는 통에 공전했다.
뒤늦게 남선씨도 맘을 고쳤지만 수사를 이끈 이근안이 법정에서 "고문한 일은 전혀 없다"고 위증하면서 패색이 짙어졌다. 1심은 모든 혐의를 유죄로 보고 남훈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제발 좀 꺼내달라"는 아들의 호소에 어머니는 항소심을 앞두고 한 마리뿐인 소를 팔아 변호사를 샀다.
남훈씨는 덕분에 10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201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 사이 여러 악행이 들통난 이근안은 '김근태 사건'에서 공소시효가 남은 일부 혐의로 기소돼 2000년 징역 7년이 확정됐다. 출소 후에도 남일씨 가족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이근안이 2012년 12월 14일 서울 성동구의 한 식당에서 자서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출판기념회를 열고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근안의 자서전이 나온 건 형의 49재가 갓 지난 2013년 1월 1일이었다. 300쪽 분량 책에서 그는 "5공 정권이 사라지자 고문기술자란 대명사로 매도됐다. 정치 색깔에 따라 애국을 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시대 탓을 했다. 남훈씨 사건은 '내가 취급한 주요 사건' 중 하나로 언급됐다.
남일씨는 형을 대신해 재심을 청구했고 2021년 6월 남훈씨의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장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 사법부가 인권의 보루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남일씨는 이후 이근안과 국가를 공동 피고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 "배상액의 30%는 이근안이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기념비적인 결과였지만 아쉬움이 컸다. 이근안이 수사 현장에서 가장 주도적인 인물이었을 뿐, 그의 상부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정의가 지연되는 동안 이근안의 가세가 기울면서 이제 와서 그에게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은 사실상 어렵게 됐다.
2시간에 걸친 대화를 마칠 즈음 남일씨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자님이 위장한 경찰은 아닌지 의심해요. 누군가 인터뷰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날 잡아갈 것 같단 말입니다. 오죽하면 내 손으로 그 사람을 처단하고 말겠다는 생각까지 했겠어요. 제가 볼 땐, 나라가 잘못된 거예요."

기사에 언급된 과거사 사건은
-서승 형제 간첩 사건 : 육군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가 1971년 서울대 유학생이던 재일교포 서승·서준식 형제를 간첩 혐의로 검거한 사건. 고문 의혹이 제기되면서 한일간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각각 징역 20년,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추재엽 : 보안사 출신 10·12·14대 서울 양천구청장. 김병진씨 책에서 추재엽은 1985년 유지길씨의 간첩 혐의를 조작한 수사관으로 나온다. 추재엽은 그런 김씨를 가리켜 '간첩'이라고 한 혐의(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유포 등)로 기소돼 2013년 당선 무효형인 징역 1년 3개월이 확정됐다

-김근태 사건 : 이근안 등은 1985년 9월 김근태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을 고문해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김근태는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법원이 김근태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이근안의 일부 혐의에 대해 공소시효가 연장됐다. 사후 유족이 청구한 재심에서 김근태는 무죄가 나왔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